“바라건대 이 책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삶을 더 순조롭게,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지혜 중 몇 가지는 제 삶의 중추였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죽을 날을 받아 든 지난 몇 년간은 더욱 그러했지요. 여기가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시작하는 곳이 될 수도 있고요” - 프롤로그 9쪽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책 제목만으로도 잠시 멈춰 고요함 속에서 생각하게 되는 책입니다. 1961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며 스물여섯 살에 임원으로 지명되었지만, 사직서를 내고 태국에서 파란 눈의 스님이 되어 17년간 수행하고 2018년 루게릭병을 진단받아 2022년 숨을 거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작가의 이 책은 많은 독자에게 깊은 통찰과 위로를 준 베스트 셀러입니다. 삶의 폭풍우를 만난 순간에, 정답과 확신을 과도하게 강요받는 현대인에게 진심을 다하되, 집착하지 말고,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라고 다독여 줍니다.
“여덟살 때였습니다. 할머니 댁에서 부엌 창문을 바라보던 저는 우뚝 멈추었습니다. 제 안에서 들끓던 온갖 소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습니다. 어디를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눈물이 고이고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그것이 감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 본문 15~16쪽
저자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의식하며 살아가는 의식적 현존상태를 추구하라고 말해줍니다. 현재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고 진실을 마주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연습을 하다 보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억지로 긍정적인 사고를 권장하며 일시적인 눈속임에 머무르려고 하지 말라고 전합니다.
삶에 잘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미래의 일에 덜 신경 쓰고 현재에 더 충실하며, 여유를 더해주는 한문장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강력한 주문을 되뇌며 긴장을 풀고 가벼운 산책길 나서 보시기 바랍니다.
2022년 1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떠납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 스웨덴을 휩쓸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수많은 스웨덴인을 불안에서 끌어내어 평화와 고요로 이끌었던 그는 2018년 루게릭병에 진단받은 후에도 유쾌하고 따뜻한 지혜를 전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는 20대에 눈부신 사회적 성공을 거뒀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숲속으로 17년간 수행을 떠났던 저자의 여정과 깨달음, 그리고 마지막을 담은 책으로 세대를 불문하고 독자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되찾게 하며 국내에서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 출판사 서평 중에서
성공회대 사회학 교수이자 <인권사회학의 도전> <인권의 최전선> 등 다수의 인권 관련 저서를 낸 인권 학자 조효제 저자는 <탄소 사회의 종말-인권의 눈으로 기후 위기와 팬데믹을 읽다>라는 책을 시작으로 2022년 또 한 번 인권과 환경을 같은 영역으로 다룬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를 펴냈다.
저자는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인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수자에게 관심을 가질 때 기후 위기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며, 평등과 다양성을 추구함으로써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도 가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김지혜(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책은 총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 : 야누스의 비극은 어떻게 벌어지는가?’에서는 환경파괴와 인권 파괴가 함께 일어난 사례들을 유형별로 소개한다.
‘제2장 : 지구, 인류를 법정에 세우다’에서는 생태 파괴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와 에코사이드(ecocide, 생태계나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와 제노사이드(genocide, 특정 인간 집단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하려는 행위)의 개념을 연결한다.
‘제3장 : 자연에게 권리를 주자’에서는 자연권(nature right)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권 개념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제4장: 공존을 위한 지도 그리기’에서는 현재의 사회경제 시스템에서 인간의 사회계와 자연의 생태계가 지속 가능한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에 관해 논한다.
미세먼지라는 것을 자각했던 것이 2017년도이다. 외출을 나섰을 때 짙은 회색의 자욱한 안개와 매캐했던 냄새가 아직도 또렷하다. 거대한 자연의 회복을 위해서는 개인보다는 국가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8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파괴되는 환경에 적응하며 최소한으로 나를 보호하는 방법 찾기에만 급급했지, 기후 위기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볼 시도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점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필요하다. 기후 위기를 인권위기와 동등하게 보는 관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저자의 논점이 기후 위기에 대해 몰입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회복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지속가능성의 실천을 시작해야한다. (중략) 기후-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을 따져보고, 사회 불평등을 환경문제와 연결할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p.318)
책에는 이사도라 던컨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유의 영혼을 몸짓으로 담아내는 행위를 춤이라 했던 맨발의 무용수 이사도라는 자아를 완성하고 새롭게 빚어내기 위한 춤을 췄다. 편견에 찬 시선을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의 몸짓은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며 현대무용의 서막을 열었다.
저자는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사회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휠체어를 탄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2020년부터는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무대에 오르는 삶을 살고 있다.
장애인 무용수로서 저자는 중력의 굴레를 그만의 형태로 벗어낸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그가 전하는 몸짓 이야기는 뻔하지 않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강인한 서사다.
“당신이 나를 배려해 내 앞에서 발레를 추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온전히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발레를 잘 추는 ‘능력’으로 당신은 내가 모르는 세계에 접속하는 다양한 방법을 나에게 제안할 수 있다. 내게도 춤출 ‘힘’이 있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발레를 추는 당신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데 좌절하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작용하는 힘(중력)에 봄을 온전히 맡기면서도, 동시에 그 힘에 맞서는 각자의 몸의 기술(능력) 사이에서 움직이기, 그것이 내가 아는 좋은 춤. 잘 추는 춤이다.” 본문중에서
1부 ‘빛 속으로’에서는 저자의 몸이 억압되어 ‘불거지지’ 말 것을 요구받던 유소년기에서부터 춤을 시작하면서 무용수로서의 삶을 담아내는 한편, 저자의 사유에 영감을 준 현대 무용수들의 사례를 꼼꼼히 수록했다. 2부 ‘닫힌 세계를 열다’에서는 장애인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담았고, 3부 ‘무용수가 되다’에서는 춤을 통한 경이의 발견과 공동체적 폭력을 예방하는 예술의 순기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평소 우리는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 우리에게 낯선 접촉은 불쾌한 경험을 뿐이다. 자의식의 경계를 완화해 낯선 타인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의 물리적 몸을 만지고 그 몸에 기대는 경험은, 예민하고 고립된 삶에 작은 경이를 창출한다.” 본문 중에서
내면에 언제부터인지 알 수도 없이 오랜 기간 깊이 침전하여 고립된 자아가 있다면 책을 통해 마음을 환기시키고 더욱 크고 넓은 세계와 소통하는 치유를 경험해 보자. 자신의 영혼을 춤으로서 해방시킨 장애인 무용수의 이야기가 독자의 삶에 기분 좋은 리듬을 선물할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피한다. 불편함은 우리를 긴장시키고 기존의 방식대로 반응하거나 대처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은 관점을 바꾸어 불편함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하여 말한다. 신선한 관점의 이 책은 각종 유명 인사들의 추천서가 붙은 교양 인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도서이며 아마존 분야에서 200주나 연속 베스트셀러 도서로 선정되었다.
저자인 마이클 이스터는 건강 분야의 저널리스트이자 행동 변화 전문가이다. 그는 현대인의 건강 그리고 삶의 진정한 행복과 의미에 관해 탐구해 왔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자 알래스카 툰드라로 약 한 달간 순록사냥의 여정을 떠난다.
저자는 여행을 앞두고 기대하던 것도 잠시 생존을 위해 각종 훈련을 하고 준비한다. 여정에서 그는 여러 가지 위기 상황을 맞닥뜨리지만, 그 위기에서 오는 불편감은 오히려 저자가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야생적인 식단, 고립, 따분함, 위험성 이 모든 것이다. 한 편의 사실적인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그는 이 시간이 불편함의 극치였지만 감각과 생존의 본능을 회복하는 여정이었다고 말한다.
현대 문명의 정점에서 세상은 보다 풍요로워졌고 안락하고 편리하다. 이 생활에 적응한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안함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더 우울과 피로를 느끼는 역설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현대인의 만성 질환처럼 거론되는 것, 예를 들어 우울감, 만성 피로, 무력감, 스트레스 증후군, 약물 중독, 각종 정신 질환 등. 저자는 이런 질환의 발생 이유가 어쩌면 나태해진 편안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가끔 삶을 환기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제거하고자 했던 여러 가지 불편함의 가치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본다.
불편은 단순한 고통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주고 삶의 활력을 회복시키는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불편은 정서적 내구력, 정신을 오히려 단단하고 강하게 만든다. 역경에 대한 저항성과 인격의 성장, 삶을 지탱하는 근력을 키워준다.
일상에서 시도해 볼만한 불편감을 감수할 선택지들이 있다. 저자가 추천하는 방식 중에 내가 시도해 볼 불편감은 스마트폰 없이 보내는 따분함 즐기기이다. 그리고 현재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해석이나 판단 없이 의식적으로 집중하고 몰두해 본다.
가끔 나의 죽음을 의식하는 것도 어쩌면 불편한 상상이지만 오히려 현재 주어진 것들과 삶의 의미와 감사를 회복할 수 있다.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사람들이 종종 새로운 삶의 목표를 두고 환경을 정리하고 새롭게 세워 보듯이 말이다.
“우리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피곤하거나 지루해지면 앉아서 쉰다. 아니면 시원한 음료나 정수기 물을 마신다. 또는 스마트폰의 노래를 바꾼다. 정해놓은 시간, 거리, 세트와 반복 횟수가 끝나면 사우나에 들어가 앉는다. 오늘 당장 먹을 것을 위해 애쓰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의 편안한 세상은 위대하다. 하지만 편안함으로 기울어진 결과, 우리의 신체는 도전받을 일이 거의 없고, 그 대가로 건강과 강인함을 잃어가고 있다.” _358쪽.
상실과 죽음이 바로 눈앞에 놓인 49일의 시간 속에서, 안과 슌이 끝내 마주한 것은 어떤 거창한 해답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너무 일상적이어서 쉽게 말로 옮길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도롱뇽의 49재>는 이 조용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 온 ‘독립’이라는 개념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개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내 몸과 내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아사히나 아키의 <도롱뇽의 49재>는 그 믿음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조용하지만 깊은 방식으로 흔들며 이 소설은 완전한 독립이라는 관념이 실은 얼마나 취약한 환상인지를 묻는다.
주인공 ‘안’과 ‘슌’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쌍둥이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안과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슌은 끊임없이 충돌하지만, 작가는 두 사람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독자는 어느 순간 누가 누구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는 타인의 습관이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고, 타인의 상처가 나의 밤을 잠 못 들게 했던 우리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의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은 소설 속 큰아버지의 장례식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장면은 작품의 주제가 응축되어 드러나는 지점이다. 우리는 죽음을 끝이라 부르지만, 소설은 그것을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순환’으로 그린다.
큰아버지의 죽음은 안과 슌에게 소멸에 대한 공포를 안기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역설적인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도롱뇽’과 ‘음양어’의 이미지는 소설 속 가장 의미 있는 상징이다. 이 순환의 상징을 통해 완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몸이나 기억이 과연 존재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 질문들 또한 역시 독립에 대한 강박을 풀어 주는 방향으로 작용하며 그동안의 피로는 ‘우리는 모두 얽혀 있다’라는 감각 속에서 연대와 치유의 정서로 전환된다.
서로의 삶 속에서 얽히고 스며드는 관계는 결국 삶의 무게를 나누는 일이 된다. <도롱뇽의 49재>는 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워진다는 사실을, 고요한 언어로 드러낸다.
그 감각은 작품 속 언어를 통해 더욱 또렷해진다.
“오른손이 막대를 내던지고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에 뭉클하고 뭔가가 밀려들어 와서, 나는 거기에 포개듯 왼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가슴에서 하나가 되는 감각에 기쁨이 솟아올랐다. 가슴이 간질거려서 웃음이 나왔다. 두 숨이 포개지더니 가슴 속에서 목소리가 한데 울려 퍼지며 부풀어 올랐다.” 181p.
저자 최진영은 <단 한 사람> <구의 증명> 등을 통해 인물들의 상처와 회복을 그려온 작가다. 삶의 가장 어두운 지점을 비추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전에 읽은 <단 한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 속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으로 타인의 고통을 끝까지 바라봐주는 의미를 질문한다. <단 한 사람>을 감명 깊게 읽고 자연스럽게 최진영 작가의 다른 작품인 <내가 되는 꿈>으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주인공 태희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외가에서 자라며 가족에게 받지 못한 안정감과 애정의 빈자리를 품고 살아왔다. 성장하며 가족, 친구 등 주변인과의 관계에서 이해받지 못하거나 보호받지 못한 채 감정과 기억을 조용히 눌러두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성인이 된 뒤에도 그 상처들은 내면 깊숙한 곳에 남겨져 있다.
태희는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건과 마주하며 오래전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긴장과 불안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태희는 옛 기억과 현재의 모습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고 내면을 마주한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과 변화가 얼마나 깊고 복잡한지 보여주며 큰 사건이나 화려한 반전 없이 인물의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내가 되는 꿈>은 제목에서부터 품게 되는 질문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제목만 보고 미래의 희망이나 목표에 관한 이야기라 짐작했지만, 그 꿈이란 결국 나 자신이 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나 자신이 되는 것’은 어떤 상태이며 우리는 언제 진짜의 나에 가까워지는가.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현실의 나는 어떠한지 생각해 본다.
작가가 말하는 꿈이 단순한 희망이나 미래가 아니다. 오래도록 부여잡고 있는 두려움, 외면해온 진심과 마음의 조각까지 모두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기 자신이다. 더 나은 내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책장을 덮고 나면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지금과 같은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으면 작가의 세계관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최진영 작가는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는 일과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 결국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설로 전달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이해해야 하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당신이 되는 꿈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마주한다. 뉴스를 보다가도 어떤 장면에서는 채널을 멈추고 오래 바라보게 되고, 어떤 비극 앞에서는 무심히 화면을 넘기게 된다. 같은 ‘사고’와 ‘죽음’의 이야기임에도 우리의 반응은 늘 같지 않다.
지난해 12월 29일 참사 1주기를 맞이한 무안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기 참사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충격과 슬픔을 안겼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애도했고,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표했다. 이 장면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왜 어떤 죽음 앞에서는 깊이 슬퍼하고, 어떤 고통 앞에서는 무심해질까. 같은 날, 같은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다른 사고와 재난, 혹은 먼 나라에서 반복되는 참사에 대해서는 왜 상대적으로 덜 반응하게 될까. 공감은 분명 인간의 중요한 능력이지만, 동시에 한계를 지닌 감정처럼 보인다.
장대익의 <공감의 반경>은 인간이 본래 공감하는 존재이지만, 그 공감이 언제나 넓고 공평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우리가 느끼는 공감의 모습과 그 한계를 살펴보며,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공감은 단순한 도덕적 미덕이 아니다. 저자는 진화생물학과 인문학의 관점을 바탕으로 공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해 왔는지를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믿듯 공감이 많아지면 사회의 갈등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저자에 따르면, 함께 느끼는 정서적 공감은 강한 힘을 지니지만 매우 선택적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과 ‘우리’라고 느끼는 집단에는 쉽게 공감하지만, 그 바깥의 존재에는 무관심해지기 쉽다. 이러한 공감의 방식은 인간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온 진화의 결과이며, 때로는 혐오와 배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에 저자는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는 또 다른 공감을 제시한다. 타인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그 사람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려는 ‘역지사지’의 공감이다. 이러한 공감은 나와 다른 사람,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공감의 반경>은 혐오와 분열을 넘어서는 해답이 공감의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공감이라는 익숙한 말을 다시 생각하게 하며, 우리가 어떻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지 차분히 돌아보게 한다.
올해부터 시행되는 ‘돌봄통합지원법’은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살던 곳에서 계속해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의료·요양 등 돌봄 지원을 지역사회에서 통합·연계해 제공받는 제도다. 내 집에서 죽는 게 조만간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당장 코앞에 죽음이 있는 사람들은 급하다. 화장실을 혼자 못 갈 정도로 일상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면, 또는 말기암 등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면 결코 산다고 할 수 없는 이 고통의 세계를 어찌해야 할까.
시어머니는 8년간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걸어서 들어간 병원에서 결국 돌아가시기 몇 년간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 여러 자식이 있고, 부모님 집도 버젓이 있는데 요양병원에서 낯선 이들 속에서 이렇게 마지막을 보낼 수밖에 없는 건지, 더 나은 대안을 찾아 관련 책들을 보며 한없이 우울했다. 인간답게 존엄을 지키는 노년의 삶과 죽음의 방법으로 외국의 선례를 도입하는 시스템의 개선은 너무 멀었기에 무기력했다.
이 책은 말기암으로 긴 투병 끝에 스위스 의사 조력 사망을 결심한 어머니가 아픈 몸으로 간신히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며 죽음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 선택에 동행한 딸이자 작가는, 자신과 같은 환자들이 언젠가는 한국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바라며 임종 순간까지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어머니를 기억하며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의 삶과 존엄사를 기록하며 ‘조력존엄사법’ 제정을 촉구하는 활동에 나선다.
현재 우리나라는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하며 무의미한 연명 중단 자연사는 허용하지만, 환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조력 사망은 불법이다. 어쩔 수 없었던 이들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조력 사망을 생명 경시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환자 가족으로서 그 과정이 결코 ‘안락’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조력 사망을 감행한 이유를 알려 그 선택의 무게와 필요성을 환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자기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 그것이 엄마의 뜻이었고 이제 딸인 자신이 이어 나갈 거라고.
책을 읽는 동안 자주 울컥했다. 내 부모 이야기이자 나의 일이기에. 언젠가는 나도 삶을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돌봄을 받게 되겠지. 그때 돌봄과 죽음의 장소가 내가 살고 있는 집이면 좋겠다. 지역사회가 돌봄을 받는 당사자인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호스피스, 그룹홈 등 선택할 수 있는 돌봄 시스템이 다양하며,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은중과 상연>은 스위스에서 조력 사망을 선택한 친구를 동행하는 드라마다. 다큐와 책으로도 조력 사망을 선택한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이제는 죽음과 존엄에 대해 본격적인 다양한 의견을 나눌 때가 아닐까 싶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더는 미룰 수 없지 않은가.
행복은 언제부터 이렇게 거창한 목표가 되었을까. 우리는 늘 ‘중간만 가자, 보통만 하자’라는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보통’과 ‘평범함’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하게 된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특별히 잘나지도 않은 상태를 지켜내는 일. 어쩌면 어른의 삶이란 그 애매한 중간 지대를 묵묵히 버텨내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태수 작가의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는 거창한 성공담이나 인생 역전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대신 하루의 끝에서 느끼는 안도감, 누군가와의 불필요한 다툼을 피했을 때의 평온, 내 몫의 속도를 지켜낸 날의 담담한 만족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어른’이 된다는 것을 더 많은 것을 가지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조금씩 내려놓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행복은 늘 작고, 낮고, 조용하다.
나 역시 행복이 아주 대단하거나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작가의 말처럼 ‘불행하지 않은 상태’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삶에 대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내 행복의 진입장벽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무더운 날 땀에 젖은 몸을 따뜻한 물로 씻어낸 뒤 에어컨 바람을 맞을 때, 퇴근길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평택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순간. 그 짧은 찰나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크지 않지만 분명한 감정이다.
책 속 에피소드 중 ‘사람을 싫어해도 괜찮아’라는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저자처럼, 나 또한 사람을 싫어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학창 시절 친구가 평생 친구가 되며, 인맥이 곧 자산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어딘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관계를 끌어안고 버텨내는 일이 반드시 성숙함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올해 중학생이 된 친척 동생을 보며,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꼰대 같은 조언을 건네게 된다. 친구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기에도, 맞춰가되 깊은 상처까지 감내할 필요는 없다고.
관계는 끝까지 버텨야 할 숙제가 아니라 선택의 영역일 수도 있다고. 작가의 말처럼,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삶이 결국 마음을 덜 소모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진다.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의 삶이 정말 부족한지, 아니면 충분한 상태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요란하지 않아도 괜찮고, 남들에게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담담하게 알려준다. 평범함을 유지하는 일이 버거운 시대에, 이 조용한 문장들은 말한다. 지금 이 정도라면, 우리는 이미 꽤 잘 살아내고 있다고.
힘이 드는 일은 항상 오른손으로 한다. 글을 쓸 때도 양치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거의 모든 노동은 오른손이 담당한다. 왼손도 역할이 있기는 한다. 시계나 팔찌를 찰 때 반지를 낄 때는 왼손이 주로 한다. 로션을 바를 때도 오른손이 왼손에 짜주곤 한다. 둘이 똑같이 생긴 손인데 어렵고 힘든 일은 오른손이 하고 번쩍번쩍 폼나는 일은 왼손이 하는 것 같다.
왼손과 오른손은 어느 날 매니큐어를 바르게 된다. 언제나처럼 오른손이 왼손에게 먼저 발라주었다. 그다음 왼손이 오른손에 발라주게 되었는데 왼손은 너무 서툴러서 잘 바르지 못한다. 너무나 엉망으로 매니큐어를 발라준 왼손에게 오른손은 화를 내게 된다.
인간관계도 내가 더 많이 맞춰주거나 인내하는 관계가 있다. 그런데 왼손 중에는 일부러 못하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경우도 많을 것 같다. 묵묵히 노력하고 있으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먼저 해버릴 수도 있는 것 같다. 부부나 친구 또는 직장 동료 사이에서 그런 경우가 많다. 자기의 일이 아니면 잘 하지 않는 사람과 남의 일까지 나서서 하는 사람, 뭐든 느리게 하는 사람과 빨리해야만 하는 사람, 잘 못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과 잘하든 못하든 하는 사람 등 성향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자기 일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은 이기적이라 볼 수 있지만 남의 영역을 존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뭐든 느리게 하는 사람은 신중하다고 볼 수도 있다. 잘 못하는 일은 안 하고 잘하는 일만 하는 사람은 선택과 집중을 잘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뭐든 내가 더 손해 보고 사는 것처럼 느껴져도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왼손처럼 행동할 때도 있을 것이다. 왼손처럼 행동하는 상대방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오른손 같은 사람도 있고 왼손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은 왼손과 오른손을 다 가지고 있는 존재다. 한 사람이 어느 경우엔 왼손처럼 또 다른 경우에는 오른손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림책을 보며 각자 느끼는 감정과 생각하는 바는 다를 것이다. 이 책은 부모님이 자녀와 함께 읽으며 얘기를 나누기에 좋은 책이다. 책에서 마지막 부분에 왼손은 오른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이제 오른손이 답할 차례”라고 하는데 꼭 독자에게 하는 말 같다. 자녀들과 혹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주변에 왼손 같은 사람 혹은 오른손 같은 사람은 누가 있는지 대화해보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작가는 갈등의 끝에서 줄곧 오른손을 바라보던 독자의 시선을 잠시 왼손에게 돌린다. 과연 왼손은 어땠을까? 그 단순한 질문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한다. 오른손과 왼손을 떠나 ‘늘 혼자만 고생하며 섭섭하다가도 상대가 어려울 땐 가장 먼저 달려가는 나’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노력하지만, 모든 일이 마음처럼 쉽지 않은 너’만 남기 때문이다.”